Category: 이론/서적

마라토너의 러너스하이

[윤기성 원장의 “재미있는 스포츠 의학”] 마라토너의 러너스하이
▲ 고통스럽게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고통이 사라지고 기분이 황홀해진다. 부산일보DB

마라토너인 L씨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수십 분을 달렸는데,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면서 양 다리는 자동기계처럼 저절로 움직이고 기분이 경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상태는 십 여 분간 지속되다가 다시 본래 상태로 돌아갔다. 그 후부터 L씨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뛰어도 계속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한다.

L씨와 같이 고통스럽게 달리다가 어느 순간을 넘어가면 몸이 가벼워지면서 기분이 황홀해지는 상태를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한다. 이러한 순간은 마라토너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스키, 서핑, 축구 심지어 레슬링 선수들도 자신의 능력치를 뛰어 넘으면서 운동할 때 똑같이 황홀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상태를 ‘운동 하이'(exercise high)라고 부르기도 한다.

황홀감·행복감·성취감 느껴
운동 만끽하려는 진화의 결과

‘러너스 하이’ 때의 느낌은 모르핀을 투약하거나 마리화나를 피울 때와 비슷하다. 마약을 한 상태와 비슷한 이유는 대뇌가 실제로 그 순간 마약성 물질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대뇌가 분비하는 물질은 엔도르핀과 카나비노이드이다. 엔도르핀은 모르핀과 유사한 물질이고 카나비노이드는 마리화나와 유사한 물질이며 작용도 비슷하다.

대뇌가 마약성 물질을 분비하는 것은 운동으로 체력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 받는 신체적인 스트레스극복하고 계속 달리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분비된 마약성 물질은 대뇌 속에 보상과 동기 부여, 감정, 통증과 관련된 부위에 가서 작용을 한다. 마약성 물질의 성취감, 동기 부여, 황홀감, 행복감, 통증 감소의 효과 때문에 운동이 중독성을 가지게 된다. L씨가 힘들어도 운동을 중단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른 포유류에게도 발견된다. 개와 같이 달리기가 필요한 동물은 오래 달리면 마약성 물질의 분비가 많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쉬지 않고 계속 돌리는 것도 이것과 연관이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는 사실 다람쥐가 러너스 하이를 즐기는 셈이다.

개나 다람쥐와는 반대로 담비와 같이, 오래 달리기가 필요하지 않은 동물은 달려도 마약성 물질의 분비 효과가 크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러너스 하이’는 오래 달리기가 필요한 동물에게 훈련을 장려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로 여겨진다. 사람이 ‘러너스 하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람에게 달리기가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중독을 즐기면서 운동을 하여 건강을 유지하자.

 

<서울재활의학과의원 원장>